for. sue & 인

 

 

 

성장판이 이제 닫혔다는 이야기를 듣고 엄마랑 같이 병원을 나왔다. 고개 숙인 진재유 앞에서 엄마는 의사와 함께 엑스레이를 걸어 놓고 한참을 떠들었다. 인제 고 3에 농구하는 아라 그러는데, 혹시 더 클 가능성이 없을까요? 그렇게 말하는 엄마 앞에서 차마 재유는 그 대학, 농구로는 이제 가기 영 힘들 거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 스스로도 알고 있다. 희망을 걸기에는 너무나 작고 작은 희망이고 기적이라. 그냥 하루하루 이어져 나가는 것이 이상하리만큼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입 안에서 그것을 혀로 굴리면 꺼져버릴 지도 몰라, 말로는 불안감을 꺼내지도 못하는 것이다.

 

어릴 적 진재유는 마이클 조던이 되고 싶었다. 농구를 잘 하는 농구의 신 마이클 조던. 비디오 속의 마이클 조던은 코트를 누비고 재생 버튼만 누르면 여전히 농구를 잘 하는데 진재유는 어쩐지 이제 현실에 눌려선가 인종이 달라선가 키가 작아선가 아니면 기량이 모자라서? 그것도 아니면 임승대가 전학을 가서? 모든 이유로 지상고등학교 농구부에서 조던이 될 수가 없었다. 꿈은 어릴 때 꾸는 거지 지금 와서 우예 말이 되어야지. 꿈도 꿀 수 있는 꿈을 꿔야지. 그래야지.

 

 


 

 

체육관에는 성준수와 진재유 단 둘 뿐이었다. 1학년들은 죄다 수업이네 뭐네 하면서 연습은 오지 않는 일이 태반이었다. 운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3월인데도 아직 감독이 구해지지 않아 쉬는 내내 보는 눈이 줄어 조금 마음이 편했다. 코치가 담배 피러 나간 사이 슈팅 연습 하는 성준수를 내버려두고 체육관 벽에 기대어 눈을 감고 저번에 들었던 음악을 마음 속으로 틀었다. 불렛포마이발렌타인의 레인보우베인스. 마음속으로 재생을 누르고 작게 속삭여본다. 여기까지 읊조리고 시작부터 딱 30초 후 터져나오는 비명 같은 기타. 그렇게 흐름을 따라가고 잠시 생각을 멈춘다. 여기서 잠시 공백 그리고 다시...

 

-재유, 너도 그만 놀고 연습해.

 

얼마나 시간을 되감았는지 준수는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미안타 내 잠시 뭐 생각좀 한다고... 
-그래.

 

입안에 가사가 걸린다.

 

I wanna heal so i'm self medictating

 

내도 내가... 
나 스스로...

 

목에 걸린 말이 말로 나오지만 못했지 바라기는 정말 간절하게 바랐다. 이 인생이 별 게 아니기를. 노력이 헛되지 않기를. 그리고 그만큼 돌려 받기를. 갑자기 체육관 문이 덜컹 소리를 내고 열렸다. 코치님이 처음 보는 남자를 데려와 체육관 여기저기를 둘러보더니 우리를 손짓으로 부르고는 가서 1학년 애들 다 데려오라고 이 분이 너희 감독님이시니까 앞으로 말 잘 들으라고 당부를 했다.

 


 

 

지상고의 올 해 첫 승리는 내 활약이 단연 돋보였다. 내가 마이클 조던은 아니어도 내가, 진재유 아이가. 뿌듯한 마음에 속으로나마 좀 너스레를 떨고 아슬한 스코어를 베개 삼아 기쁘게 잠이 들었다. 다음 경기도 이겼으면 좋겠다. 이런 마음이 얼마나 오랜만에 든 것인지 새삼스레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래 기분 좋아도 되나? 그 농구할 때 가장 중요한 거, 간지.  그걸 생각하면 조금 더 많이 부끄러웠다. 그래 맞다. 멋있는 거면 내도 많이 좋아하는데...

 

...멋있는거 뭐가 있지? 마이클 조던, 락, 아이솔레이션, 기타 리프 그리고....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엄지를 편 손을 들어 올릴 때가 아직도 생생하다. 조금이지만 희망도 자신감도 분명히 갖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1대1 해 볼만 하다. 이 게임 이길 수 있다! 그리고 그 마음을 하늘이 들어준 것인지 정말로 이겼으니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조금만 조금만 희망을 가져도 항상 꺾어갔으면서 어째서...?

 

 


 

목에 걸린 말이 말로 나오지만 못하지 간절하게 바랐다. 이 인생이 별 게 아니기를. 노력이 헛되지 않기를. 갑자기 체육관 문이 덜컹 열렸다. 코치님이 처음 보는 사람을 데려와 체육관 여기저기를 둘러보더니 우리를 손짓으로 부르고는 가서 1학년 애들 다 데려오라고 이 분이 너희 감독님이시니까 앞으로 말 잘 들으라고 당부를 했다.

 


 

멋있다 진짜 내가 생각해도 멋있다 진재유 점마 진짜로 간지 난다

 


 

기상호가 마지막 3점을 넣으며 그렇게 마침내 장도고를 이겼다. 그 기나긴 쌍용기 모든 경기가 이제야 끝났다. 내내 이어지는 모든 승리가 꿈인 양 어색했다. 실적이 생긴 것은 특히나 더. 막내한테 제가 감독님께 받았던 말을 물려준 게 제법 뿌듯했다. 너는 니 생각보다 농구를 잘 한다고. 이 3점에 내가 한 몫 했다. 한여름에 이불을 코 끝까지 덮어쓰고서 얼굴을 붉혔다. 입꼬리가 쭉 올라 감정이 숨겨지지 않았다. 내가 낸데! 내가 진! 재유, 아이가! 잠이 오지 않는 밤에 눈만 도록도록 굴리고 내일이 오는 것을 기쁘게 여기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어머님, 아드님 엑스레이 다시 확인을 해봤는데 아무래도 직원 실수로 다른 환자 분과 착각을 한 것 같습니다. 아드님거랑 비슷한 나잇대 남자 환자분 거 하고 바뀐 모양이에요. 의사선생님께서도 지금 보시더니 충분히 여유가 있어서 성인이 되어도 좀 더 클 가능성이 있다시네요. 저희 병원 다시 들러 주시죠. 처방 다시 내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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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산 것도 아닌데. 참 이상하게도 쉽게 잊히지 않는 감각이 있다. 수술대 위에서 마취제에 절어갈 때 느끼는 그것이 가장 비슷할지도. 새하얀 조명등 아래서 10부터 1까지 거꾸로 세어 내려가는 목소리가 귀에 어른거린다. 그다음에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내 오른쪽 무릎은 살갗이라고는 하나도 볼 수 없었다. 붕대로 꽁꽁 둘러싸서 꽉 묶어버렸는지 감각 자체가 내 것 같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야. 나는 그냥 하라는 대로만 했을 뿐인데.

 

병상에 누워서 생각을 정말 많이 계속 끝없이 했다. 그 사람 생각도 많이 했다. 역시 성과가 내고 싶었던 거겠지.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그렇게라도 하는 편이 조금 마음이 편하더라. 그래도 언뜻 드는 생각이 계속 자신을 좀먹었다. 그래도 왜 하필 나를 갈아다가. 나를 갈아다가 만드는, 어엿하고 훌륭한 성과! 승리! 우승! 그러고 나면 다 같이 행복한 결말을 이루고 나는 거기서 우승기를 흔드는 그런 결말을 모두가 원했을 텐데.

 

그런 생각을 몇 날 며칠을 하다가 쓰게 웃으면서 이제는 붕대가 감기지 않은, 그냥 흉터만 남은 무릎을 쓸었다. 이렇게까지 당하고도 사랑하는데 이유가 있냐고 묻지 않았으면 좋겠다.

 

영원히 일어나지 못했으면 차라리 갈망이 덜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뒤처져야 했었던지 그 하루하루를 그리고 1년, 2년 늦는걸 받아들이는 데만 해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재활은 일상이 되었다. 양 무릎에 고무 밴드를 걸어놓고 할 수 있을 만큼 펼쳤다 내리는 데 드는 반복 횟수가 점점 늘어갈 수록 조금씩 앞으로 나가면 늦어도 한 발은 더 디디는 거라는 그런 생각을 하려고 애를 썼다.

 

늦은 건 늦은 거, 떨치고 나가는 것은 또 그런 것이다. 사람들은 늦어도, 뒤처져도 괜찮다는 말을 쉽게 쉽게 하는 버릇이 있다. 본인이 늦으면 화를 낼 거면서.

 

아마 그것을 깨달을 때쯤 된 것 같다.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도대체 이제 와서 누가 내 시간이 늦게 간다고 얼마나 화를 낼 것이며, 누가 나를 위해 평생 울어줄 것인지 생각하는 일도 전부 그만두었다. 내가 뒤처지는 건 정말 순식간이었는데. 그래도 뒤처지는걸 선택하는 것은 그것에 대해 생각할 만한 시간도 여유도 있었다. 전부 내 선택이야. 남에게 받은 명령이 아니라고. 나에게 불리한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건 자신을 깎아서 버리지 않는 일은 오히려 마음에 좋았다. 그렇지만 재활은 절대 쉽지가 않아서. 처음에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 부터 그다음에는 발을 내딛고, 걷고, 뛰고 달리고 그리고 볼을 튀기고 림에 메다꽂아서 점수를 내는 모든 과정에 순서가 있다는 게 조금 많이 힘들었다. 숨을 쉬는 것마저 배워서 해야 한다 생각하면 당신도 아마 아득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나도 그렇다.

 

당연하게 해야 하는 이 모든 일들을 다시 배운다는 게 진짜 힘이 드는 건 정말로 맞는데, 그래서 힘드냐고 물으면 그렇다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거라 내가 즐거워지려고 하는 모든 것이고. 그리고 이거 이겨내면 결국 즐거울 거라서 퇴원하는 순간까지 웃었다. 지기 싫어서. 이 삶을 살아야 하는 건 난데 스스로 생존을 포기하기 싫었고 싫은 만큼 뒤처지더라도 노력이란 것을 해야만 했다. 예전의 나만큼은 아니어도 내가 했던 만큼 다시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그런!

 

이런 마음은 정말 오로지 나만의 것이라서 가끔가다 입 밖에라도 낼라 치면 초원이가 대표로 싫은 소리를 했다. 귀여운 녀석들. 이렇게, 이런, 잊을 수 없는 이십 일 년을 지내온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너희는 아마도 영원히 모를 것이다. 그리고 절대로 모르기만 했으면 좋겠다. 이런 건 전부 형아한테 맡겨줘.

열 여섯 살 뱅 경기 중에 다리 다치고 병원에 입원한 후에 한밤중 병실에 나타난 열여섯 살 상호 

햄이 엄청 작고 말랑하게 생긴 것도 지금 적응이 잘 안 되는데 소리도 없이 울고 있어서 더 난감하고
왜 자신은 이래 작고 마른 애가 병찬햄이라고 생각이 드는 지 모르겠는 와중에 
말로 할 수 있는 위로는 또 자신이 없었음

 

 

뱅은 뱅대로 우느라 얼굴 숙여 가리고 있지만 갑자기 옆에 사람이 나타난 것도 
그 사람이 제 옆에 와 앉는 것도 다 알아서 그저 당황과 혼란의 연속

 

하지만 그래도 일단 우는 게 먼저였다고 한다 내일이 수술이었기에 많이 무서웠다고

침대에 쪼그려 앉아서 우는 소리 내는 뱅을 가만히 옆에 앉아서 위로한답시고 느린 템포로 토닥토닥 하는 상호

히끅히끅 하는 소리를 내면 다정한 손길로 토닥여주는 게 나쁘지 않았지만 
그러니 달래줄 수록 더 울음이 나는 심리 아시나요


자꾸 계속 더 큰 소리로 우는 햄 진정시킬 겸 뱅 품에 안고 등허리에 팔도 감음

뱅은 그렇게 한참 안겨서 울고 이제야 하는 말이 

 

"너 근데 누구야?"
"아 맞다 햄 저 모르시지 참 그게 저 기상혼데요이하주절주절자기는미래서왔고지상고1학년인데..."
"고등학생...? 형아야?"
"아뇨 햄이 형이죠."

 

설명 들어도 오늘 밤은 그저 싱숭생숭해서 깊게 생각하기 싫고 그냥 상호 어깨에 얼굴 파묻으면서
혼자 있기 싫었는데 잘 됐다 따뜻하다 좋다 이런 마음에 이거저거 물어봄

 

자기는 미래에 뭐 하고 있는지, 수술은 잘 됐는지 그런 거

자기가 아는 병찬햄에 대한 걸 하나하나 얘기해주는 상호를 빤히 보다가 말을 끊고

 

"근데 되게 착하다 너... 부산에서 왔댔지? 어디 갈 곳은 있어?" 
(도리도리)
"그럼 우리 집 와서 나랑 살자."

물론 이 상호는 스물한 살 박병찬이랑 이미 사귀는 중이었고
아직 대학도 못 가서 동거고 미래고 얘기 한 번도 꺼낸 적 없는 스물한 살 햄 생각하며 얼굴 붉히며

 

"지... 진짜요?"

기대에 찬 기상호

16뱅은 아까만 해도 위로한답시고 세상 다 잃은 얼굴이었던 상호가 한참 어른 같았는데
저 말 한 마디에 자기 또래나 할 법한 진위 같은 거 따지지 않고 정말 그대로 설렜단 얼굴로 되묻는 거 보고 막 웃어댔다. 

 

키가 커서 되게 형 같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너 되게 귀엽다 나 나중에 커서 부산 가면 너 볼 수 있어?"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요 ;9"
"그럼 그때 까지 나는 농구 계속해야겠네."

 

저 때문에 농구를 하겠다는, 애인으로서도 자기가 응원하는 농구선수로서도 상당히 기특한 소리 하는 햄 보면서 표정 관리가 정말 안되다 못해 아예 감출 수가 없는 상호는 기습적으로 그리고 충동적으로 말랑한 뺨에 뽀뽀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을 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이다음에 만나면 그때는 어른의 키... ㅅ... 하여간에 그거 해주세요!"


하고 그날 밤은 둘이 한 침대에서 구겨져서 이거저거 얘기 나누다 까무룩 잠이 듦 

아침에 일어나 보니 상호는 없고 수술은 이제 곧 시작해야 한다는 얘기 듣는 뱅

어젯밤에 상호 만나기 전에는 수술 많이 무서웠는데 이제는 많이 괜찮아져서
웃는 얼굴로 수술을 잘 받았답니다.

 


 

그렇게 16살의 뱅은 21살이 되고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상호한테 잘 해주고 관심도 갖고 이뻐하고 상호도 싫은 눈치 아니란 거 알아서 이래저래 순탄하게 사겼대요
그런데 아무리 떠 보고 물어보고 그래도 상호는 그때 일을 모르는 것 같음 섭섭했다네요

 

"상호 너 예전에 인천 와서 형아 위로해주고 갔다~?"
"네? 제가요?" 
"어 맞어~! 그리고 이건 그때 받은 거 이자 친 거야!!"

 

라며 상호 턱을 잡더니 고개를 틀더니 입술 한 번 쪽 부딪치고 그 새 열린 입 안으로 혀를 슬쩍 밀어 넣었다고

상호는 너무 놀라서 눈을 감을 수도 없었고 병찬햄이랑 사귀기로 한 건 맞는데 
한 번도 이런 끈적한 거 안 했기에 궁금하기도 하고 하여간 이렇게 가까운 햄도 처음이라 눈을 감을 생각을 못 했고

낌새가 이상한지 한쪽 눈을 슬쩍 뜨는 뱅을 보고서야 아차 해서 눈 감아버렸는데
한참 이어지던 첫 키스가 끝나고 눈을 뜨니 그 순간 

 



상호는 수술 전날에 병실 침대에서 앉아 울고 있던 어린 박병찬을 만났다고 합니다

“너 왜 나만 보면 자꾸 벌벌 떠냐?”

 

 

 

며칠 무덥던 여름을 질타하는 듯한 장마가 끝났다. 그리고 3월 입학하자마자 농구부에 들고 여름 초입에 이르기까지 성준수란 사람을 겪어오며 예정된 문답에 답해야 할 상황도 결국 와 버렸다. 

 

“내가 너한테 뭐 못할 거 했어? 왜 자꾸 내가 손만 들면 자꾸 쪼는데?”

 

바로 이거.

 

기상호에게 이 질문은 난제나 다름이 없었다. 무서워서 그렇다고 대답하기에도 쫀 게 아니라고 대답하기에도 그랬다. 절대 두 가지 다 지금 당장 사람 잡아먹을 듯이 구는 성준수에게는 만족할 답이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피하는 것도 답이 아닐까? 그렇게 잠깐 틈 사이에 생각을 고쳐먹었다. 한참을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시간 끄는 행위란 이런 것이다. 라고 몸으로 표현하며 뻐겼다. 

 

이제 정말 오답이든 뭐든 답을 말할 시간이 됐다는 것을 스스로 충분히 느꼈을 때, 한숨을 한 번 쉬고 입을 열었다. 밝혀도 되는 것이 있다면 확실한 것을 하자.

 

“제가, 햄을, 좋아, 해… 서요.”

 

고개를 들고 본 성준수의 얼굴은 격노했다던가 역겹다 혹은 평소의 성난 얼굴이 아니었던 게 더 충격이었던 것 같다. 이런 표정 이런 얼굴 이런 성준수를 보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니까. 아까까지 대답을 미루느라 구겨졌던 눈썹이 펴질 때마다 설레는 마음이랑 동시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어 그러냐…? 그래. 그래라….”

 

다들 무섭다 하지 않았나? 고백이라는 거. 물론 무섭다는 건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무섭긴 무서운 거란 말 맞는데, 아니 고백도 이 사람도 무섭기는 마찬가지긴 한데! 예상한 게 아니었던지 한참 동안 말문이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아니 좋아한다니까요?”

 

“아 계속 그러라니까!”

 

그 일갈을 마지막으로 그렇게 한여름 무더위 헤프닝은 정리되는 줄만 알았다.

 

 

 


 

 

 

한 달여 지난 지금에 이르러 기상호의 시선에서 보는 성준수는 요즘 조금 아니 많이 아니 그것보다는 정확하게 표현하면 꽤 이상했다. 

 

그래, 애초 다정한 사람이 아니라고까지는 말은 못 하겠지만 일단 적어도 확실한 건 사나운 사람이라고는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게 지상 고등학교 3학년, 19살 성준수라는 사람이라는 게 기상호가 평소 하는 성준수의 캐릭터 분석이었다.

 

그렇게 씌워놓은 이미지가 깨져버리는 일이 자꾸 일어나는 건 조금 무서웠다. 

 

예를 들어서 어떤 거냐면 다른 사람 같이 구는 것 같은 거 말이다. 분석상 이 성준수란 사람은 절대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변했다. 변한 건 변했다 치고 그게 좀 이상했다.

 

일단 처음으로 일어난 사건은 목마르다고 아메리카노를 들이키는 것을 봤을 때였다. 거기 커피만 있었으면 말을 안 하겠는데 미안하게도 그곳은 편의점이었고 초콜릿 우유부터 식혜까지, 적어도 쓴 거 싫어하는 성준수가 절대 선택할 리 없는 아메리카노란 선택을 하는 게 눈에 띄었던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일도 있었다. 이건 좋긴 좋았다. 평소의 성준수를 입시 악귀라고 다들 운운하긴 했었지만 그 입시 악귀가 분명 씌인 것 같았던 사람이 퇴마까지 당했다는 부분인데. 그렇게 말하면 좀 웃기긴 하다만 정말 그랬다. 평소보다 덜 날카롭고 모든 면에서 더 유해졌다. 

 

같은 팀이지만 테크니컬 파울을 부르고 싶었을 정도로 무서웠던 언사가 어느 순간 사라졌다. 그게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칭찬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욕 한마디를 조금이라도 덜 듣는다는 것이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한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일어난 일은 한층 더 어이가 없었다. 

 

제가 쓰다듬을 받는 일이었다. 막내 취급을 이제 와서? 어느 순간부터 경기가 끝나면 다짜고짜 와서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나쁘진 않았다. 예뻐해 주는 거 싫어하는 사람 아무도 없다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그렇지만 그 상대가 저라는 것은 기상호에게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게임이 끝나면 멀리 있어도 다가와 운동하는 사람 특유의 그 거친 손으로 그렇게 마구잡이 엉망진창 머리를 쓰다듬었다. 때로 사람이 없을 때는 그 손이 뒤통수를 따라 목선을, 귀 끝을 매만지는 그런 말도 안 되는 행위를 정말로 했다는 것이다. 그 성준수가.

 

 

 

 

그 이후 몇 주가 흐르도록 그와 숙소에 단둘만 남는 극한 상황을 바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최소 고백하기 전만 해도 확실히 없던 게 맞다. 좋아하는 사람이랑 둘이 있다는 것도 그렇고 이어지는 모든 상황이 심적인 부담으로 작용했으니까. 

 

그러고 역시나 아주 기적적으로, 아니 불행하게도 오늘 숙소에 남는 사람이 단 둘뿐이었다. 어떻게 고백을 한 건 자신인데 이 상황이 불편해질 수가?

 

그런 생각을 하며 숙소 현관을 들어서는 마음이 무겁기 짝이 없었다. 한숨을 한 번 쉬고 3단으로 된 걸쇠를 걸어 잠갔다. 그러고 집에서 이래저래 싸 온 상온에 못 둘 만큼 썩기 쉬운 과일, 반찬 등 이런저런 식료품을 냉장고에 잔뜩 채워놓고 주방 겸 현관을 지나 평소 생활하던 방으로 들어갔다. 

 

평소 같았으면 시끄러웠을 곳인데 이상할 정도로 조용해 불안한 기색을 느꼈다. 턱을 괴고 누운 성준수와 최소 1m 이상의 간격으로 떨어져 앉아 곁눈질로 기분을 살폈다. 이 더위에 어떻게 평소 같은 자태를 유지할 수 있는지 솔직한 심정으로는 좀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침대 매트리스 사이에 끼어있던 리모컨을 찾아 에어컨을 틀고 지정석 같은 자리로 돌아가자 약간 반응이 있었다. 분명 평소 눕는 자리가 아닌데 은근슬쩍 자신의 근처로 당겨오는 성준수의 행동이 또 이상할 정도로 익숙해 보였다. 

 

위화감이 든 것은 눈길이 닿는 부분이었다. 끈적한 여름에 끈적하게 묻어나는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알 것 같아지자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손만 닿으면 바로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그것을 못 느낀다면 역시 사람 새끼가 아니지 않을까? 아직 남들보다 어려 다듬어지지 않은 팔과 어깨를 향해 닿는 시선은 분명 평소보다 짙었다. 

 

그쯤 되면 솔직하게 말하자면 무서웠다. 그렇다고 고개라도 틀면 대번에 쌍욕이 날아올 기세인 건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눈을 내리깔고 티비라도 켜려고 리모컨을 잡았다. 그리고 그에 더해 손목을 붙잡혔다. 당황한 채로 잡힌 손을 빼자니 그 입에서 뱉어낼 말이 진짜 너무나 무서웠고 그대로 붙들려 있자니 초침 흐르는 소리까지 들릴 게 뻔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렇게 헤매는 사이 잡은 손목을 제 입 가까이 당겼다. 푸르게 흐르는 정맥을 따라 팔 안쪽을 가지런히 혀로 핥는 모습이 생경해 그대로 혼절할 뻔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중 하나 확실하게 든 건 한 가지였다. 

 

진짜 아름답다. 

 

이거 원래 이 사람에게 쓰라고 만든 말 아닌지? 무섭다는 감정은 이미 사라진 지가 오래였다. 점점 더 짙어지는 시선이, 혀끝이 점점 미세하게 감도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일단 한 가지는 모르기는 몰라도 이대로 두면 일단 당장은 편해질 거란 거였다. 

 

그 마음을 눈치라도 챈 듯이 대번에 쥔 손목을 당겨왔다. 파득 떠는 눈꺼풀이 생경해 아름다웠다. 관람하는 새 마른 입술이 붙었다 떨어졌다. 더운 여름을 시기하는 듯이 뜨거웠다.

 

고등학교 1학년, 아직 같은 학년 중에서 저보다 키가 작은 애는 있을지언정 나이가 더 어릴 아이는 하나도 없는 이 남학생에게서 처음 맞는 입맞춤이라는 이 같은 일에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아무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아무리 키가 비슷해도 3년이나 더 운동하고 산 성준수를 완력으로 떼어내기는 불가능했다. 막히는 더운 숨을 몰아쉬며 세게 도리질을 쳤다. 혀가 얽히는 것이 절대 싫지는 않았지만 이제 확실히 알았다. 이건 역시 내가 알고 있던 그 성준수가 아니다.

 

 

 

“제발 그만 하세요. 형 우리 준수 햄 아니시잖아요.”

 

팔꿈치 안쪽을 누르던 입술을 떼어내고서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그러고서 저를 다시 붙드는 팔이 아까와는 다르게 상당히 거칠었다. 

 

“야, 똑바로 봐. 내가 성준수가 아니라고 생각해?”

“저희 준수 햄은 저한테 이렇게 안 하시니까요….”

 

울먹이는 목소리로 하는 대답을 듣던 성준수의 표정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일그러져갔다.

 

“너랑 나. 지금 사귀고 있는거 아니냐?”

 

그 눈동자에 안광이 형형하게 드리워질 때 기상호는 본능에서 오는 두려움을 느꼈다. 어떻게 이럴 때만 진짜 ‘성준수’ 같을 수가 있지? 말도 안 돼. 무서워. 뭐야 지금까지 물고 빨고 할 때 그 텐션 그거 다 가식이가?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눈물이 나려 하는 것을 겨우 삼키며 억지로 대답했다.

 

“저는 제가 아는 준수 햄이 좋아요.”

 

저릴 정도로 꽉 쥔 팔에서 손을 떼어내 그대로 얼굴을 덮고 마른 세수를 하는 성준수의 모습에 되레 겁이 나는 스스로가 어이없었다. 하지만 이건 겁낸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니까. 잘못 짚었을 리 없다. 역시 이 사람은 내가 아는 성준수가 아니다. 그러니까 거절해야 한다. 맞아. 해야 한다. 그렇게 결심하는 동시 귓가에 이어지는 한 마디.

 

“그럼 2년 뒤에도 계속 좋아할 거냐?”

“…네.”

“그럼 됐다.”

 

잡아먹을 듯한 표정을 한 그를 앞에 두고 울며 대답을 마쳤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성준수는 무표정한 얼굴로 한숨을 쉬고서 그대로 일어나 방문을 열고 신발을 꺼내 신기 시작했다. 숙소 현관문을 걸어 나가는 성준수의 뒷모습이 내내 흐렸다. 

 

 

 

 

그 사이 문득 이상한 생각이 스쳤다. 분명 내가 들어오면서 문을 잠갔는데? 틀림없다. 그런데 현관 잠금장치 여는 소리가 나지를 않았다. 이상한 낌새에 눈을 비비는 사이 흐려져 가던 형체가 완전히 허물어진 것을 알았다. 역시 이상했다. 감은 틀리지 않았다. 역시 아니었어. 우리 햄 아이다.

 

 

분명 2년이라 말했다. 짧다면 짧다. 사람이 변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으니까. 

 

설마하는 마음과 함께 눈에 띄는 건 벽면에 걸린 화이트보드에 빼곡히 적힌 수시 모집 요강이었다. 준향대학교. 8강 이상의 실적. 진짜 설마? 역시 그건가? 일단 당장 쌍용기로 8강 실적을 채우니까. 정말로?

 

역시 저 사람은 내가 아는 성준수랑은 약간 달랐던 이유가, 그리고 굳이 2년을 들먹인 것도 역시 그렇게밖에 생각이 안 들었다. 이제는 잘 지워지지도 않을 만큼 오래된 글씨를 보며 적어도 지금은 그게 어떤 일을 말하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인지 열여섯 먹은 저도 알고 있었다.  작은 단서 하나지만 그게 주어진 이상 이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기상청의 예보에 따르면 8월 중순에는 태풍이 우리나라를 거쳐 북상할 거라고 했다. 그리고 지금은 2시, 태풍은 진짜 상륙 중이었다. 대학로도 캠퍼스도 체육관 앞도 마찬가지. 

 

비닐 우비에 골프 우산까지 바리바리 챙겨서 준향대 캠퍼스 입구에서 성준수가 나올 때까지 착실히 기다릴 작정이었지만 제아무리 관찰력 좋은 자신이어도 사람이 나올 때마다 고개를 들이미는 것은 우산까지 덮어쓰고 하기에는 상당히 버거운 작업이었다. 

 

밖에서 대기하는 건 역시 올바른 선택이 아니었으려나. 

 

태풍이 올 때 매번 정비 한다 쳐도 당장 옆에서 나무가 뽑히고 보도블록이 날아가는 건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기다리는 사람이란 입장에서 본인이 날아가지 않았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길 뿐이었다. 당장 지금은 대학생일 성준수를 만나는 것이 설레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가 없었다. 

 

 

그야 뭣보다 일단 내가 고백도 했고 이쯤 되면 역시...

 

 

어?

 

 

순간 불현듯 깨달았다. 이게 받아준 게 맞나? 만약 그때 내가 고백했던 사람이 만약 저기 다니고 있는 성준수가 아니라면? 만약 내가 보내준 그 준수 햄이라면? 어쩌면 만약에 내가 내 손으로 고백하고 내 손으로 끝낸 거라면? 만약 아예 없어져서 준향대학교에도 다니지 않는다면? 그 이전에 애초 고백을 받아준 건 맞던가?

 

마셔본 적도 없는 술이 깬다는 그 감각이 기상호를 덮쳤다.

 

그런 생각에 매몰되어서는 한참을 물에 빠진 생쥐 같은 꼴을 하고 애타게 성준수를 찾았다. 이미 얼굴은 너무 울어서 심하게 부어 있었다. 그러나 저 멀리서 오는 익숙한 걸음걸이를 발견하고부터는 눈물이 터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점점 이 쪽으로 다가올수록 이미 제 손으로 멀리멀리 보내버린 ‘그’ 성준수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얼굴이 너무나 반가웠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발끝이 꺼지는 듯한 안도감마저 들었다. 

 

눈이 마주치고 보란 듯한 모양새로 당당히 걸어오던 성준수는 기상호를 향해 다가오는 내내 단 한 순간도 놀라지 않았다. 당연하다는 듯이 보였다.

 

“햄….”

 

단정한 얼굴이 울음 섞인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바로 일그러졌다. 이 얼굴에 안도하는 사람이 눈 앞에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 성준수는 알고 있을까. 그러고는 평소와 같은 익숙한 입매를 한 그 입을 열어 말했다.

 

“이 시바거가 왜 사람들 많은 데서 질질 짜고 지랄이야.”

 

기적은 따로 있지 않았다.

 

그 입에서 나올 한 마디가 어떤 것인지 듣기 위해 지금까지 얼마나 헤매고 있었던지 모른다. 안도감은 또 다른 감정으로 변해 그 망할 태풍 속에서 그야말로 폭풍 같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 꼴을 보다 못한 성준수는 급기야 길바닥에서 대성통곡하는 기상호를 붙들고서 폭우를 향해 내달렸다. 한 명은 울고 한 명은 욕하며 달리는 꼴이 꽤 볼만 했다. 

 

달리는 내도록 이제껏 있었던 일을 횡설수설하는 기상호를 보며 성준수는 그게 내 알 바냐는 듯한 소리를 건성건성 뱉었다. 

 

“진짜 무서웠다고요. 햄!”

 

“그래 니가 나 말고 2년 더 묵은 성준수한테 홀렸다고? 어어.”

 

그렇게 성준수의 체력이 바닥을 보일 때가 되어 도착한 곳은 비를 피하기에나 그럭저럭한 버스정류장이었다. 도착하고 숨을 고르는 새 이미 안쪽까지 전부 젖어 결국 제 소임을 다한 우비부터 벗겨냈다. 우산은 이미 한참 전에 팽개쳤다. 

 

그러고서는 반 넘게 젖은 기상호의 머리칼을 따뜻한 손이 덮었다. 

 

“돌아가자.”

 

“햄 근데 지금 여기 계속 있으면 프로는 몰라도 대학은 간 건데 이래 돌아가도 괜찮아요?”

 

“몰라, 나 없다고 여기까지 찾으러 온 거면 19살의 내가 아예 존재하질 않는단 거 아냐? 그러면 여기서 농구 어떻게 더 하겠냐고.”

 

태연하게 대학교를 다니며 농구를 하고 있었던 사람 치고 생각보다 논리정연한 소리를 하는 성준수의 얼굴은 사뭇 진지해 보였다. 그런 표정을 보며 얼 타는 사이 해야 했던 말이 그대로 입에서 흘렀다.

 

“아 그거도 기억나요? 저랑….”

 

자못 무례하다 할 수 있는 성급한 입맞춤에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여기엔 없었다. 한참 이어진 무드 없는 키스가 끝나자 성준수는 그대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가자고.”

 

정말 처음으로 제 의지로 성준수의 손을 붙잡은 기상호는 이제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선택에 실수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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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고등학교의 겨울방학은 다른 지역보다는 좀 늦은 편이다. 2013년 1월 16일. 부산에 눈이 내렸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물론 인천에는 내렸고, 심지어 포근하지도 않아 상당히 춥더라. 교정은 이미 눈밭에 미끄러진 타이어 자국과 발자국으로 꽉 들어차 있었다. 

 

겨울 방학과 종업식과 졸업식을 한 번에 같이 치르는 거야 보통 있는 일인 것이고 그냥 그렇게 몰아쳤기에 바쁜 일정이라 느낀 것인지 모르겠지만 14년 만에, 드디어! 초등학교 입학부터 지금 장장 14년만에 고등학교를 마치는 이 졸업식은 나름 특별한 일이 맞았다.

 

쾅!

 

그 넓은 체육관에 사람은 하나. 세계관 최강자 타이틀을 거머쥔 이 박병찬이 내려다 꽂는 덩크는 보는 눈이 없어도 아주 짜릿했다. 더해서 진짜 어른이 되는 기념도 포함해 장장 14년 초중고등학교 생활의 마지막 세리머니를! 그래도 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렇게나 신이 나는데! 

 

코트 바깥으로 걸어 나오는 기분이 상쾌했다. 눈 때문에 걸음에 더 힘이 들어가는데도 그리 화가 나지 않았다. 정말 특별할 게 없는 평범한 학교. 외관에 쌓은 벽돌은 이 학교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안전하게 아이들을 지켜왔는지 새삼스레 보였다. 이런 평범한 학교에서 그나마 신기하고 놀라운 것은 바뀐 교복 디자인 -모두 이건 아니라고 말했다- 과 또 5년도 안 된 신생 농구부의 협회장기와 쌍용기 8강 축하 플래카드의 존재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이제야 겨우 졸업하는 늦깎이 졸업생이 있다는 것이겠지. 

 

다른 아이들보다 1년을 더 기다렸던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박병찬은 그대로 체육관을 나와 마지막으로 눈 쌓인 운동장을 빙 돌았다. 추억 이라면 질리도록 쌓았다. 눈 감고도 걸을 수 있을 것 같은 학교. 학교. 학교. 세상에 대학 가는 데 14년이 걸리는 게 말이 되냐? 그런 생각을 하고 그대로 픽 웃었다. 웃음 끝에는 희미하게 울렁거림이 섞여 있었다.

 

교내 방송으로 폭설로 인해 음향 장비 세팅이 어려워 교실에서 방송으로 졸업식을 한다는 방송이 들렸다. 박병찬은 아직도 간간이 내리는 눈송이를 맞으며 교실을 향해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눈부시게 하얀 눈밭에 닿던 시선의 끝에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3학년 10반 교실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팻말이 걸렸다. 

 

복도에는 부모님 또래쯤 되는 처음 보는 어른들이 한껏 꾸미고서는 자기 아이들이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있는지 보려고 창가를 향해 서성거렸다. 그 복도 사이에서는 나이를 스물하고 두 살 더 먹도록 대학 못 간 아들이 부끄럽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를 키우는 데 지쳐서 그랬는지 몰라도 부모님은 보이지 않았다. 수많은 학부모 무리를 뒤로하고 교실 문을 열었다. 복도 창가쪽 맨 뒤, 내 자리에는 노란 프리지어 꽃다발이 놓여있었다.

 

“어?“

 

밖에는 줄 사람이 없고 안에는 받을 사람이 없었는데 왠 꽃? 주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내버려 두면 대강 찾으러 오겠거니. 암만 생각해도 내 것도 아닌데 싶어 관심을 접고 책걸상에 몸을 구겨넣었다. 턱에 팔을 괴고는 삐딱하게 고개를 꺾으며 끝의 끝까지 이제 마지막으로 듣는 지겨운 교내 방송을 향해 고개를 세워 경청하는 척 하고서는 즉시 딴 생각으로 빠져들었다.

 

준향대학교 체육교육학과 13학번 박병찬.

 

이제 새로운 딱지가 하나 더 붙는다. 나 드디어 대학 간다! 이제 더는 규격 외 고등학생이 아니라니. 종업식이 끝나고 귀가하는 아래 학년들 뒷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먼저들 귀가하는 학생이 있다는 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래, 안녕이다. 이 꼬맹이들아! 끝도 없이 길어지는 졸업식 축사를 들어야 하는 당장 처지에는 딱히 불만이 없었다. 이제 곧 전부 끝난다. 남들보다는 2년이 더 걸렸지만 괜찮아. 아무도 들을 수 없도록 눈을 꼭 감고 소리 없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 환호성 사이에 이상하게 뭔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뭔가 안 챙긴 게 있는 것 같은데.

 

교장선생님의 훈화를 마지막으로 안전하고 확실하고 정확하게 졸업식은 교실에서 끝났다. 이 추위에 나가서 안 한게 어딘지. 같은 반 동생들은 담임선생님께 우르르 모여 달려들었다. 어린 동급생들이야 그러려니 두고 나는 우리 선생님 뵈러 가야겠다 하고는 짐을 챙겼다. 사물함에도 책상 서랍에도 든 게 없었다. 그래, 교실에 올 일이 있어야지. 의자에 걸쳐둔 하얀 롱패딩을 도로 입고는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갔다.

 

 “형!”

 

신발장 앞에 앉아서 깔창을 밀어 넣는 동시에 익숙한 고성이 귓전을 울렸다. 초원이 그 책상 위에 두고 온 노란 꽃다발을 들고 달려들었다. 부딪치기 직전 그 앞 몇 걸음을 남겨두고 병찬의 품에 그 꽃다발을 던지듯 안겼다. 한참을 찾았는지 멍청하게 선 내 얼굴을 보던 초원이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형은 진짜.”

 

눈물을 어떻게 흘려야 할 줄 몰라선지 그 입에서는 먼저 곡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생이 이렇게 많은데도 아직 우는 동생을 달래주는 일에는 영 익숙하지가 않네. 마음이 흘러내렸다. 분명 아까까지 그래도 좀 홀가분해도 걸리는 게 있다 싶었더라니, 어쩐지 이게 마냥 시원하기만 한 게 아닌게.

 

“정말 치사하다 진짜! 어떻게 인사도 안 하고!”

 

우리 조형 고등학교 최고의 슈터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서럽게 울었다. 그것도 너무 오랜만에 울었나? 우는 게 뭔지도 잘 몰랐는지 한참 다 큰 애가 다섯 살배기 어린애 울듯이 안겨서는 꺼이꺼이 한참을 울었다.

 

“아이고, 왜 울어 왜. 형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아이고! 뭐가 그렇게 서러워.”

 

어린애 달래듯 달래고 있으려니 우는 본인도 부끄러웠던 모양인지 가슴팍에 안은 노란 프리지어를 내려놓더니 와락 안았다. 시근거리는 숨이 더웠다.

 

“그동안 고생 정말 많이 했어, 진짜로.”

“됐고, 두고 가지나 마요.”

 

품안에서 한참을 서럽게 울던 초원은 이제야 좀 부끄러워졌는지 고개도 못 들고 목 언저리부터 귀 끝까지 새빨갛게 변해서는 본론을 털어놓았다.

 

 “어제 전화 왔는데 형이 간다는 그, 거기 저 추합이래요.”

 

멀뚱히 있는 내가 민망했는지 그러고 이초원은 다시 목 놓아 울었다. 세상에! 이런 다 큰 동생이! 거기다 쫓아오는 속도도 너무 빠른거 아닌가? 

 

“같이 가자고? 이제 난 거기서 제일 큰형도 아닌데? 나, 이제 그냥 박병찬인데?”

 

하얀 패딩에 눈물을 발라가며 내미는 초원이의 큰 손을 내려다보는데 문득 왠지 잡지 않았다간 이대로 후회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학창 시절의 마지막 전리품이라면 진짜 어른이 된 기념으로 가져도 괜찮지 않나? 떨리는 손을 들고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초원이가 못내 멈추지 못해 훌쩍거리는 걸 바라보다 크게 웃었다. 그래, 같이 가자. 네가 내 미련인가 보다. 두고 가는 건 역시 못하겠어. 그냥 계속 데리고 다닐래. 내민 손을 맞잡고 학교 바깥으로 끌고 나갔다. 눈밭에 발자국은 두 사람분이 나란히 찍혔다.

"가만히 좀 있어요." 

찰싹 때리는 손이 매웠다. 

"들어보라니까, 초원아. 그래도 내가 잘못한 건 아니지 않아?" 

"아니! 그럼 이게 잘못한 게 아니고 뭐란 말이에요?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애초에 안했지!" 

 

초원은 있는 힘껏 병찬의 등짝을 한 번 더 때렸다. 접수대에 접수를 하는 와중에도 또 한 차례를 더. 그 광경을 보며 접수대의 직원은 무슨 산만한 덩치의 남자들이 나잇값을 하네 못하네 등 실없이 티격거리는 것을 지켜보다 겨우 한 마디를 했다. 

 

"저희 병원 처음 오셨나요?" 

"아! 네. 이름은 박병찬이구 나이는 만으로 xx살 xx년생이에요 아 그… 주민 등록 번호는…." 

"개인 정보는 본인이 작성해 주세요. 혹시 보호자로 오신건가요?" 

 

초원은 여기서 입을 다물어 버린다. 

 

 

 

 

 

 

보호자

 

 

 

 

 

 

우리 사이에서 보호자라는 단어도 닿을 수는 있겠지만, 그렇지만.

 

"아뇨. 보호자는 아니고 친한 동생이에요."

 

접수를 하고 시무룩해진 이초원의 얼굴을 끌어당겨서 손으로 감싸고 토닥거리는 틈에 금세 마음이 녹았다. 

별 수 없다. 바깥에서까지 이렇게 달래주는데 어떻게 화를 풀지 않을 수가.

 

 

 

"엄마 저 오빠 삐졌나봐. 애기도 아닌데. 근데 봐봐 저기 잘생긴 오빠가 막 달래준다?"

 

 

 

반대편에 진짜 보호자와 같이 온 어린 아가씨가 둘을 보고 손가락질을 하는 것을 보고 얼결에 손을 풀어버렸다. 이초원은 아직도 바깥에서의 스킨십에 따르는 일련의 특이한 시선으로 닿는 남들의 그 눈이 부끄러웠다. 보호자 노릇 하고 싶어서 그러냐고? 아니 못하니까 이런 거지. 거기다 입술이 불퉁 나온 초원을 달래는 그의 남자친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난 안 괜찮은데 형은 괜찮나봐.

 

 

 

"수술도 아닌데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아? 괜찮아~ 괜찮다니까!"

 

등이며 어깨를 토닥거리기도 잠시, 박병찬은 뭔가 생각에 빠졌다.

 

 

 

 

 

 

 

 

 

클리닝 서비스는 유료입니까?

 

 

 

 

 

 

 

 

 

"와 준향대 진짜 대단한 학교다."

"저희 학교도 제법 대단한 모양인데요."

 

 

 

한가로운 아침, 피씨방에서 막 두 사람 다 떨어진 기숙사 통지서를 클릭하고서 병찬이 초원을 손짓으로 불렀다.

 

 

"할래?"

"네? 뭘요."

"자취, 형이랑."

 

 

즉시 시선이 바깥으로 튀는 초원을 느긋한 얼굴로 보던 병찬은 이 귀여운 전리품이 품에서 빠져나가지 않도록 단단히 틀어쥐기 위해 갖은 수를 썼다. 돌아보지 않으려는 초원을 향해 턱을 한껏 당기고 눈을 최대한 크게 뜨고 애원하는 투로 이름을 부르는 그 얼굴은 제 아무리 모르는 척 하기 달인이라 해도 넘어갈 수 밖에. 

 

 

박병찬과 이초원의 동거는 생각보다 건조했다. 마치 숙소 생활 같은 동거. 그렇게 둘이서 같이 계약한 집에서 장장 다섯번의 재계약을 하고 정말 만 5년을 꽉 채우고 나자, 사귀자는 이야기는 결국 이초원이 먼저 하게 되었다. 기실 고백을 누가 먼저 하는지는 서로에게 정말 별 대단한 일은 아니라서. 실은 마음이 있는데도 5년을 이 모양인 게 웃기기도 했다.

 

그래, 좋아하는 것에 우열을 두는 것은 멍청한 짓이고 그 좋아하는 거 앞에 두고 제일 좋아하는게 뭐냐고 묻는건 더 멍청한 짓 아닌지. 그리고 그걸 좋아하는 사람의 입에서 들으면 기분이 정말 영 그렇기에. 그리고 그러한 이유로 박병찬에게선 확언을 받아낼 수가 없었다. 

 

 

이초원은 그 날 세 번이나 마음이 상했었다. 형은 도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 이초원에게 박병찬은 답안지 없는 문제집이나 마찬가지라서, 림 없는 골대 같아서 박병찬이 물어보는 것은 항상 똑같이 되묻게 된다. 제일 좋아하는게 뭐예요? 나를 좋아하는게 맞아요? 좋아하기는 하죠?

 

그 답은 몰라도 암묵적으로 전부 그러하다고 동의를 하는 두 사람은 서로 불편하지 않을 만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초원은 아침에 못 일어나는 병찬을 두고 조용히 씻고 강의를 들으러 나갔다. 병찬은 그런 초원이 타이핑 소리에 깰까봐 저소음 키보드를 샀다. 서로 받는 배려가 깊어갈 수록 이상하게도 두 사람의 거리감은 예전보다 점점 견고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결국 참지 못한 쪽은 박병찬이라. 

 

조심성 없는 병찬이 방 여기저기 쌓아둔 물건 더미를 뒤지느라 늦게 들어온 이초원에게 수신호로 대강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서는 초원아 혹시 귀이개 봤냐? 하는데 이미 이초원은 욕실에 들어간 후라 들을 수가 없었다. 매정하기는. 따뜻한 물로 씻고 나올 때 까지 기다리더니 이젠 거의 막무가내였다. 

 

 

나 귀 파주라. 여기 안에 너무 간지러운데 혼자서는 잘 못 건드리겠어 도와주라 초원아. 올려다보는 얼굴에 시선을 뺏긴 채로 이초원은 주저앉아버렸다. 너 기다리다가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초원의 오른쪽 무릎에 고개를 올려 놓고 간지러워 죽겠다고 허벅지에 착 달라붙었다. 침음을 삼키는 초원을 보며 병찬은 킥킥 웃었다. 

 

 

 

 


 

 

 

 

그 해 겨울은 조금 일찍 찾아왔다. 겨울 맞이 차원에서 보내준 귤을 초원이가 잔뜩 까 두고 그걸 주워먹고서는 또 한 조각씩 초원이에게 먹여도 주는 이 상황에서도 둘은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형 귀 안쪽으로 빠져 버렸는데 이 안에 한 번 파봐도 괜찮겠어요? 응. 그냥 해버려 깨끗하게. 그런 말을 하는 것 치고 조금만 깊게 들어가도 잔뜩 움츠렸다. 금속으로 된 꼬챙이가 안쪽을 긁어내는 게 생각했던 것 보다 그렇게 응석부리는 모양으로만 비치지도 않았다. 

 

"아파요?"

"아니."

 

그러고서도 병찬이 움찔거릴 때 초원은 더 놀라서 바로 귀이개를 빼 버렸다. 아냐 괜찮아 형이 참을게 그냥 해봐. 응 거기. 그쪽에 좀 더 깊게 더 들어가도 돼. 한참의 사투 끝에 이제 손끝이 덜덜 떨리는 것이 느껴져 오늘은 이제 괜찮다며 초원의 손을 잡고 토닥였다. 원래 이렇게 긴장하는 애가 아닌데. 뭘 이렇게까지 긴장을 하고 그러냐. 내뱉는 말에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맞추지 못하는 얼굴이 귀여웠다. 가끔은 이렇게 해도 괜찮겠는데. 아니 자주 하자. 그 자주 있게 되자마자 그 일은 아주 사소하지만 큰 일로 결국 마무리가 되고 말았다. 병찬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스킨십 없는 애인에게 들러붙을 유일한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왜 이런 기회를 뺏어가냐고.

 

 

 


 

접수처에서 한바탕 하고 앉아 기다리는데 초원이 말을 걸었다.

 

"형은 왜 아픈걸 왜 자꾸 참으려고 해요?"

 

 

 

박병찬은 이초원의 걱정 어린 잔소리가 들리는 것이 싫지 않았다. 그 걱정이 어디서 나오고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 아마 기본적으로 사람이 다 그렇듯이 초원이도 다른 무엇보다 병찬이 아프다는 것을 싫어하는게 맞을 거다. 누가 다치고 아픈 사람을 옆에 두고 싶어할까. 하지만 그것도 역시 조금 다른 사람들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걱정하다가 돌아버리는 꼴을 봐야 형은 속이 시원해요? 아니 진짜 애도 아니고 이러는건 너무 심하잖아요."

 

애초부터 이 모든 것을 다 처음 시작한 것은 병찬이라 어느 한 구석에도 숨을 곳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치만 니가 내 기분을 몰라서 그래. 박병찬은 속으로 툴툴거리면서 이비인후과의 접수대로 향했다. 귀 안의 이물감이 기분 나쁜 건 병찬인데 옆에 따라 붙은 초원은 재재재재 잔소리가 길었다. 지나가는 간호사가 병찬에게 주의할 점 몇 가지를 알려주고 있었는데 이초원이 긴장한 투로 끼어들어 말을 잘랐다.

 

"저, 혹시 보호자도 필요한가요?"

 

초원의 그 걱정 어린 물음에 박병찬은 웃음이 팍 튀어버렸다. 

 

"친구분이 걱정이 많으신가 봐요."

"아, 아니 수, 수술할까 봐…."

 

그렇게 이 부끄러움의 몫은 초원이 가져가는 줄 알고만 있었다. 호명하는 소리에 병찬이 졸고 있던 초원의 무릎을 두드리기 전 까지는.

 

"저도 같이 들어가요?"

"같이 안 갈 거 면 너 왜 데려왔게?"

"네?”

”내 보호자 해 줘야지. 니가 내 남편이잖아.” 

 

마지막 말은 아무도 듣지 못하게 이초원의 귓가에 속삭여버려서 이제 초원에게만은 병찬의 팔에 끌려나가는 이 복도가 꼭 버진 로드 같았다. 

 

 

"박 병찬 님-!"

 

 

다시 한 번 부름이 들리자 병찬은 결연한 얼굴로 대답을 한 번 하고 오른팔에 초원의 팔을 꼭 끼고 씩 웃으며 그대로 진료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사망/자해요소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여러분의 트리거유발방지를 위하여 긋는 최소한의 안전선 입니다 취향이 아닌 분께서는 열람하지 않는 것을 권장합니다 트리거 : 자살 자해 사망 폭력

 

 

 

 

 

 

 for. 충무김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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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엄지손가락을 긋는다. 이번에도 갈라진 틈이 도로 붙고 핏자국이 서서히 사라진다. 언제부턴가 아무리 해도 상처가 나질 않았다. 사람의 이해가 닿지 않는 일은 이미 벌어졌고, 다치지 않는 세계는 참 매력적이었다. 아무리 몸을 험하게 굴려도 흉이 나지 않는 것은 상상 이상, 천하무적이라도 된 것 같았다. 누구도 나를 해할 수 없어.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는 게 내 재능이고 능력이고 노력이고 실력일지도? 다시 낙오되지 않으리라는 상상은 달콤했고 그만큼 나를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궁금했다. 그 상처들이 어디로 가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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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그것은 정답이 아니었다. 내가 가진 능력 말인데, 그건 회복력이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작스럽게도 나의 상처가 일부분 옮겨가기 시작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점차 빼앗긴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은 것이 아니라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결국 찾아낸 '사라진' 것은 내가 입어야 할 상처로 반 주검이 된 내 옛 단짝이었다. 초원이. 그 애를 다시 만나자마자 손을 낚아챘다. 그 엄지손가락에는 딱지도 앉지 않았다. 그저 상흔만 가득했다. 셔츠를 벗기자 온 몸 가득 상처를 입은 초원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제야 알았다. 너였구나. 네가 다 가져갔구나. 그게 뭐가 좋다고.

 

 

 

/

 

내가 온전히 가질 수 있는 것은 그냥 고통 뿐.

 

 

 

/

 

“나 때문에 너만 고생이다. 그치?”

자조하는 내 앞을 막아서며 초원이가 슬쩍 웃었다.

“그래도 형이 흉지는 거보다는 낫죠.”

이초원은 그렇게 상처투성이가 되어서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이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지만. 

 

 

 

/

 

초원이는 내가 입어야 할 상처를 제가 입는다는 이유로 대신 타깃이 되었다. 걔를 때린다고 나에게 상처가 나는 것이 아닌데도. 목적은 순전 분풀이. 있는 것은 오직 고통. 나는 여전히 배를 채여도 발을 밟혀도 겉으로는 아무런 징후가 없었다. 아픈 티도 안 내고 상처도 고통도 모조리 없다는 듯 참아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게 참을 수 없는 일이 아닌 이상에는.

 

 

 

/

 

세 사람이 앉은 작탁 위, 아니 두 사람과 엎어 놓은 시체 앞의 패를 읽고 입을 열었다. 자 우리 초원이는 살아있지도 않은데 너보다 나아. 천화. 봤지? 초원이가 이겼어. 넌 졌고. 인제 그만 하자. 너는 이제 우리한테 줄 점수도 없잖아. 그러니까 끝이야. 자, 이제 초원이 살려내. 살려 내라고. 아무도 너한테 얘 죽이라고 시킨 적 없잖아. 살려내. 나 대신 애를 벌집 만들어놨으면 내 소원도 하나 쯤은 들어줘야지. 내 초원이 살려 달라고. 제발 좀 살려줘. 니가 신이라며. 팔 한 짝이든 무릎이든 다 좋으니까 줄게. 초원이만 살려줘. 나 없었던 걸로 해도 돼. 얘가 무슨 죄야? 뭘 잘못했는데? 이기면 뭐든 해 준다면서? 왜 거짓말을? 

 

/

 

멱을 움켜쥐고 죽일 듯 몰아세워도 돌아오는 것이 없었다. 웃는 얼굴도 없었고 대신 맞아줄 초원이도 식었다. 아주 완전하게 혼자였다.

 

/

 

때때로 엄지손가락을 긋는다. 사람의 이해가 닿지 않는 일은 이제 내 상관이 아니다. 관여하게 해줘. 이제 누구도 그 애를 해하진 못해. 아무도. 내 능력, 내 재량, 내 권위, 내 힘, 내 거. 혹시라도 만에 하나라도 다시 살아 돌아온다면 이 흉터는 당연히 초원이가 가져갈 테니까. 믿을 것은 그것 하나 뿐이 없었다. 그렇게 남은 것은 난도질당한 엄지손가락 하나. 그리고 고통 받는 사람 하나가.

 

 

 

나에게 준 건 

 ‘한 때 좋아했었다’는 추억이 아니다. 

 

 

 

 

 

 

 

오늘, 한국 프로 농구계 수지 병찬햄의 자살 이슈 이후 딱 1년째 되던 날. 박병찬 팬카페에서 죽치던 사람들을 모아서 추도회 겸 교류회를 연 건 솔직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형이 아무리 열심히 농구를 했었고 엄청나게 잘생긴 사람이었어도 이제는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는 중이었으니까. 사람 다 빠진 팬카페의 5명만 빼고. 그 리젠 없는 게시판에 살아있는 5명이 오늘 밤 모여 교류회인지 추도회인지를 하기로 했다. 

 

 


 

 

“이건 다들 절대 진짜 진짜로 절대로 못 보셨을걸요? 저한테 답장을 주셨거든요. 이건 프런트도 매니저 통한 것도 아니고, ‘개인적으로’ 보낸 거라 내용은 저 말고는 절대 아무도 모른다 아입니까?”

 

 

나 기상호, 닉네임 babyshark. 병찬햄에 대한 트루 러브를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아무도 모르고 나만 아는 편지도 오늘 사람들 앞에 풀어놓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닉네임 강동원에게 이 말을 듣기 전까지는.

“박병찬 자살 아닙니다, 타살입니다. 제가 오늘 여기 나온 이유는 병찬이가 자살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섭니다.”

여태껏 조용히 파일철을 감상하고 있던 닉네임 강동원 씨가 침을 튀기며 당당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 이유라는 건 내게는 들리지도 않았다. 아니. 뭔가 이것저것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뭐라고 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형이 스스로 불을 지르고 그대로 분사했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만 반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는데… 

타살…? 어째서? 우리들은 분명 화기애애하게 나의 인터뷰 모음 스크랩 파일과 이것저것 형의 유니폼과 싸인지를 꺼내놓고 서로 한 명 팬으로서 누가 더 박병찬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자랑하고 있었는데 분명,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그래서 강동원 님은 그걸 어떻게 아시는데요? 그거 관계자 밖에 모르는 사실 아입니까?”

멍청하게 듣고만 있다 정신을 가다듬고 닉네임 강동원 씨가 하는 말을 천천히 되짚어 보니 그건 정말 나 정도는 되어야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는 게 생각이 났다. 

 

 형이 숨져있던 곳이 창문이나 문이 아닌 안쪽의 옷방이라는 거 하나.

 화재 직전에 구단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거 둘. 

 

내가 아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다. 원하기만 하면 이런 정보 알아내는 건 식은 죽 먹기다. 뭐 꼭 손대면 안 되는 정보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제가 달밤에 미친 경찰 수사관이거든요.”

 

 

닉네임 강동원를 향해 한마디 한마디 뱉는데 속에서 이상한 것이 끓었다. 내 신분까지 말을 뱉자마자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통에 소란이 있었다. 겨우 다섯밖에 없는데 어쩜 이렇게 분주한지. 그래도 한가지 확실히 해 두고 싶은 게 있었다. 왜 죽은 형을 이렇게 못살게 구는 걸까. 그냥 잊혀지는 것도 아니고 끝끝내 가십거리로 만들려 하는 이유는 뭘까. 내가 사랑하는, 내 우상이자 아이돌인 병찬이 햄을 위해서 오늘 하고 싶었던 건 그런 게 아니었는데.

 

 

 


 

 

 

“…여기서 찐팬 아니신 분은 좀 손 좀 들어주실래요?”

 

 

아까와는 다르게 싸늘하게 식어버린 내 말투에 머뭇거리던 닉네임 강동원 그러니까 전직 담당 매니저 씨와 '아 저는 팬 된 지 1년밖에 안 됐긴 한데 그래도 들어야 돼요?' 같은 소리를 하는 머저리와... 나를 뺀 모두가 손을 들어왔다. 

머저리는 그것도 사실 1년 전쯤엔 이름 석 자만 알고 있었는데 왠 슈퍼마켓에서 일하던 중에 박병찬 선수가 자기 집이 이 근방이라고 뭔가 이거저거 사러 와서 사진도 찍어 주고 싸인도 해주고 해서 그때 실물 보고 좋아졌다고 말했다. 1년이라며… 형이 죽은지가 이제 1년 인데 죽기 직전에 빠졌단 말같지도 않은 말을 내뱉는 저 인간은 도대체 뭐야?

 

“뱅차이 행님이 집에 바퀴벌레 나온다 하셔가지고 제가 집에도 함가가 잡아 드렸는데요. 그기 잘 안 잡혀가지고...”

 

얘는 박병찬 선수 집에도 가 봤네. 순식간에 머리가 차가워졌다. 머리속에서 부러운 마음과 억울한 마음이 교차하는 소리가 났다. 당연하다. 형네 집 주소를 안 것도 답장이 와서였지, 난 몰랐어야 했던게 정상이다. 팬 싸인회를 할 때 조차 나와 눈 마주치는걸 어색해 했던 사람이니까. 그래 안다. 나도 직접 주소를 달라고 한 적 없었으니. 물론 팬이랍시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집에 초대하는 순진무구한 사람이 내가 앓던 병찬 형일 줄은... 햄은 상상 그 이상의 사람이구나. 정말 편지를 몇 백통을 보내도, 답장은 단 한 번 밖에 안 해주는 사람이라서 정체 모를 사람에게도 그리 살가운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날  바퀴 잡고 피곤하다 캐가 쿠키 구우시던거 있길래 주방 정리 쫌 해드렸죠. 그리고 펭귄 모양 병이 몇 개 있길래 그날 산 올리브 오일이랑 이거저거 정리도 좀 해드리고…”

 

 


 

 

요약하자면 이랬다. 

Babyshark 님은 그냥 편지나 몇 백 몇십 통 보냈던 사람이고, 그러니까 날 제외한 여기 네 명은 매니저, 고등학교 동창, 은사, 햄 번호도 따고 집에도 가 본 사람이었다. 여기서 절망감을 느끼면 되나? 지금까지 내가 일등 가는 팬이라고 자부했는데 나는 겨우 스크랩이나 하고 인터뷰나 읽은 게 다라고? 그저 웃겼다. 정말 지고지순한 순정팬으로서 지위가 위태로웠다. 아니 솔직히 약간 아니꼬왔다. 이럴 때일수록 아닌 척하는게 상책이지.

고등학교 동창이 눈썹을 찌푸리더니 입가를 훑으며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 형이 매년 생일 챙긴다는 사람이 전데요. 형이 쿠키 굽던 건 저 줄 건 아닌 것 같아요. 생일이 한참 남아서…“

“이래 친한 사람이 많은데 다른 사람이었나보죠. 뭐.”

 

나도 모르게 툴툴거리게 되는 것이 어쩐지 나이를 먹고도 나잇값을 하지 못했다.

 

“아니지. 형 요리되게 못하는데? 저한테 생일 선물이라고 주는 것도 다 실패한 요리라서 아마 모르는 사람은 주고 싶어도 못 줬을걸요.”

 

초원이라고 했던가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그 사람은 생일 축하에 약간 악이 받쳤던 모양이었다. 부럽구로. 그런 멋있는 형아한테 맛있는거 받았으면 복인 줄 알아야지. 나 같았으면 덜 익은 컵케익이건 다 탄 팬케이크건 싹 다 먹고 배탈이 난다 해도 그 배탈마저 행복했을 텐데. 아니 잠깐 그건 먹지 말고 보존 처릴 했어야 했나?

 

 


 

“그런데 왜 병찬이는 문 앞까지 달려 나왔다가 다시 안쪽 방으로 돌아갔을까요? 거긴 창문도 없었는데 ”

 

이번에는 은사님의 턴인가. 표정 관리라는건 참 어렵네. 프로 농구선수의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은 쓰게 웃으셨다. 그때 그대로 뛰쳐 나왔으면 살 수 있었을 텐데 라는 말이 생략된건 그 분을 처음 만난 나도 알 수 있었다. 연이어 매니저가 입을 나불거렸다.

 

  “아 이건 직접 가본 사람 아니면 모르는 얘기죠? 글쎄 그 안에 편지가 있었다나요. 한 몇 백 통은 되는 것 같던데.”

 

 

 

 

숨이 막혔다.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 있었으면 분명히 그렇게 했으리라. 테이블을 향해 주먹을 내리치자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차분해졌다.  그 분위기에서 입을 뗀 건 이초원 하나뿐이었다. 그는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정말 다 해야 하는 성미인 모양이었다.

 

"그... 아까부터 걸리는 게 있었는데, 아까 저 분이 그날 형 베이킹 하고 있었다고 했죠?"

"그래서 뭔데요. 뭐가 남았는데요 이제."

"어 음... 그러니까... babyshark님... 생일... 이…?"

 

어제까지만 해도 오늘 입을 떼는 것이 이렇게 힘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내일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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