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좀 먹었다고 그런가? 이상하게 잊어먹으려고 하면 할 수록 잊어버리지 못하는 게 많더라고. 생각해보면 잊으려는 생각이 자꾸 불러온 게 그 애 기억인지도 모르겠다. 잊어먹는 연습을 하면 할수록 선명도는 올라가서 마지막으로 헤어지고 난 이후로 벌써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날 생각이 난다.

 

하루종일 내리던 비가 아예 눈이 되어 흩날리던 밤이었다. 우리는 예약해 둔 식당을 취소하고 좁은 택시 뒷좌석에서 등을 돌리고 앉아 허리가 구부정하게 굽었다. 잔뜩 힘을 줘 세게 주먹을 쥔 손안에서는 반지에 커다랗게 박힌 다이아가 손바닥을 파고들어서 피가 날 정도로 아팠다. 룸미러 너머로 보이는 그 복슬복슬한 머리통을 딱 한 번만 콱 때려보고 싶었다. 아직도 그날 못 때린 게 생각이 난다. 그날 그렇게 마지막으로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못 본 것도 마찬가지로.

 

최종수랑 사귀는 거 자체는 내가 항상 그렇듯 별일이 있는 게 당연한데, 이상하게 모든 면이 무탈하게 잘 돌아가서 그런가? 마지막 헤어짐까지도 아무 이변 없이 잘 이어질 거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멍청이였다니. 믿을 수가 없네. 마지막까지 그랬다. 미워하는 건 아닌데 심란하게 만드는 데는 재주가 있는 애라, 형아가 참아 주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보니 결국 마지막을 맞이했다. 그리고 이어 미친 악연이 계속됐다.

 

보통 이런 식이었다. 종수가 우리 집에 찾아왔더라고. 나도 없었는데, 잘도. 술에 꼴아서 정신 하나도 없는 게 잘도 우리 집 비밀번호는 기억했는지 신발장에 머리를 처박고 연신 웅얼거리며 나를 현관에서 맞아줬다. 그 예쁜 입술로 박병찬은 거짓말쟁이라는 둥 악에 받친 소리를 중얼거리고 콧잔등을 잔뜩 비비며 훌쩍거리기도 덤으로 하면서.

 

“어떻게 들어왔어.”

“1231#”

 

아 안 바꾼 게 나구나. 머쓱해져서는 뒷머리를 매만지다가 엎어진 종수를 일으켜 세웠다.

 

“택시 불러줄까?”

“꺼져.”

“야, 여기 우리 집이야.”

“몰라.”

 

덩치고 키고 나보다 한참 큰 애를 들고 휘청이다가 결국 보란 듯이 도로 넘어갔다. 감싸려고 한 건 아닌데 품 안에 종수가 안긴 형색이었다. 아프기보다는 우스웠다.

 

“종수는 형아가 너무 미운가 보다, 그치?”

“…아니야.”

“근데 왜 속상할 짓만 하고 그래.”

“…”

 

최소 두 번 이상 넘어져서 분명 세게 박은 건 맞을 텐데 아프단 말도 티도 안 내고 얌전히 안겨 있는 게 아무래도 좀 속상했다. 사실 속상한 건 그거 말고도 많았다. 뭐가 속상했는지 적어두는 게 아마 마음이 편할 것 같다. 다시 똑같은 짓 안 하려면 적어놔야지. 그래서 뭐가 속상했냐면…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박병찬은 바보다.

정정한다. 멍청이다.

부지기수로 헤어지자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우리가 마지막으로 헤어지던 날은 내 생일이었다. 온종일 내리던 비는 눈이 되었고 예약한 식당까지 가는 길은 얼음 빙판이었다. 온종일 되는 일이 없었다. 나름 애써 준비한 것들을 죄다 못하게 되니 속으로 짜증이 일었다.

 

설상가상으로 예약 잡아놓은 식당까지 가는 길이 미끄럽고 험해 박병찬이 얼음판에 그대로 넘어지는 통에 엄살은 엄살대로 피우니 나도 겁이 나서 바로 예약은 그대로 취소해 버렸다. 그 취소 하는 통화를 듣자 안 그래도 빈 얼굴이 급격히 멍청해지더니 있는 대로 아쉬운 티를 내길래 화를 냈다. 너는 다치지 않는 게 첫 번째라 그래 놓고 방금 그게 다칠 뻔한 거 아니고 뭐냐고 잔소리를 했더니 얼굴이 벌겋고 퍼렇게 되더니만 대뜸 소리를 질렀다.

 

“너만 안 다쳤으면 됐잖아! 그냥 가면 될 걸 가지고 왜 호들갑이야 진짜.”

 

그 날 그렇게 우리의 오천 칠백 예순 세 번째 전쟁은 마지막 전쟁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면 제법 일은 잘 풀려서 아침에 눈을 떠보니 최종수는 품에 잘 구겨져 안겨 있었다.

 

"좁아."

"엉 내가 봐도 그런 거 같다."

 

가까이 붙지 마. 남사스러워. 저리 꺼져를 연발하는 종수가 그래도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아서 좋았다. 슥슥 보드라운 고수머리를 쓰다듬다가 더 자라고 눈을 가려줬다. 해가 잘 드는 창 아래에 침대를 둔 건 얘 취향이라 이렇게 햇빛을 피하게끔 거들어주는 건 아침에나 가끔 할 수 있었다. 얌전히 한참을 안겨 있다가 한 마디.

 

"나 집에 갈래."

 

그렇게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 허리께를 붙들고 가볍게 죽 끌어당기면 그게 또 모르는 척하고 그대로 안기는 게 제법 귀여웠다. 너 귀여운 건 나만 알지. 등판에 얼굴을 묻고 숨을 가볍게 내쉬며 간지럽히면 움찔거리는 게 제법 귀엽다. 아니 귀엽다는 말 얼마나 하는 거지? 아무튼 190 넘는 애가 귀여워서 얻다 쓸 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귀여웠다.

 

한가롭게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뭔가 잊은 게 번뜩 떠올랐다. 당장 이불을 걷어내자 대번에 실색을 했다. 둘 다 입은 게 없어서. 그리고 한기가 들어 추웠는지 이불을 도로 덮는 종수의 왼손 약지에 뭐가 반짝거렸다. 반진가? 내가 아는 반지인 거 같은데...

 

"손에 그거 뭐야?"

 

멍청한 얼굴로 묻는 내 질문에 최종수는 한껏 인상을 찌푸리고 개x끼라고 중얼거리며 옷을 꿰입기 시작했다. 이불로 몸을 대강 가리고서 구석에 던져 놓은 드로즈를 주워 입는 게 모양 빠지긴 했지만 솔직히 벗겨놓으니 제법 근사했다. 아무튼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여기저기 벗어놓은 거 주워 입던 종수가 마지막으로 매무새를 다듬더니 손에서 반지를 빼 나에게 던졌다. 그저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의 연속이라 뭐라 대응하기도 전에 이미 걔는 문밖을 향해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아까까지 잘 안겨 있었는데 왜?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는데?'

 

한낱 민간인이라 자연재해의 마음은 알 수가 없었다.

 

 

 

 

 


 

 

 

 

 

박병찬 진짜 나쁜 놈.

이번에는 정정안 해. 역시 어젯밤에 정말 모든, 있는 한껏 모든 기억을 날린 박병찬은 결국 반지를 끼워준 것도 까먹어버렸다. 이게 진짜 사람인가? 그래 술 먹고 실수한 건 일단 나다. 근데 저거는 아예 기억도 못한다. 세상에. 서러워서 눈물이 찔끔 났다. 얼굴에 던진 건 좀 미안하긴 한데, 아니 하나도 안 미안하다. 박힌 보석이 커서 아마 좀 아팠을 거다.

 

나는 맹세하건대 정말 내 건 줄 알았다. 진짜. 맹세코. 어젯밤에 저 자식이 내 손 붙들고 얌전히 끼워주길래 당연히 내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근데 뭐? 간밤에 할 짓 다 해놓고 입도 맞췄으면서 개x끼... 한길로 나와서 주저앉아 좀 울었다. 눈이 부었는데도 눈물이 자꾸 왈칵 나서 그런지 시야가 선명한 게 좀 짜증이 났다. 밥 먹다가도 그 생각이 나고 그랬다. 반지는 돌려주지 말 걸 그랬다.

 

 

 

 


 

 

 

 

 

종수는 그렇게 제 발로 나갈 때까지 계속 훌쩍거렸다. 코라도 좀 풀어주고 보낼걸. 아 이러면 애 취급한다고 더 싫어하겠네. 하여간 내가 아는 최종수는 이렇게 어린애 취급 하면 되게 싫어했다. 나보다 어리면서 웃겨 진짜. 최종수는 머리가 곱슬이고, 최종수는 키가 크고, 최종수는 눈매가 짙고, 최종수는...

 

없으면 못 살 것 같다.

 

3년이 지나서야 깨닫는 건데 역시 나는 우리 집에 종수가 왔던 그날 나는 종수에게 프러포즈를 했던 걸지도 모른다. 여기저기 흩어놓은 모든 흔적들이 그리고 종수가 손에 끼고 있던 반지가 그걸 증명한다면 웃길까. 나도 기억 못하는 내 프러포즈는 최종수에게는 어떤 기억으로 남으려나. 누워서 이 생각 저 생각 하며 빈둥거리다 결국 그 애를 생각 하는 게 정말 할 일 없는 비 시즌이라는 생각까지 닿았다. 몸이나 풀 겸 산책을 나섰는데, 우리 사이 진짜 악연인가 봐. 거기에 또 그 애가 있었다. 잊지 못하면, 그러면 잊어서는 안 되는 거 아니야?

 

지금이라도 잡으면 잡힐지 모른다. 계속 내 근처를 맴도는 종수가 원하는 것도 그것일지 모른다. 그러면 우리 사이는 다시 돌아갈 거고 돌아가면 또

 

 

 

찢어지겠지 그리고 또 붙고 또 찢어지고 붙고 깨지고 떨어지고 붙고

 

의자 등받이에 고개를 기대고 모로 푹 누웠다. 이런 관계가 계속되는 게 건전한 걸까. 그 생각을 종수네 집에 와서 하는 게 웃기지만 어쩔 수가 없다. 가자는데 안 갈 수 없어. 최종수잖아. 종수가 오라잖냐. 걔가... 오라고 하잖아. 나를 부르잖아. 나를 찾잖아. 내가 필요하다잖아. 가질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잖아. 끼지도 않고 가지고 다니는 반지 케이스가 벌써 다 벗겨져 부끄러웠다. 이번에는 정말로 제대로 기억해야지.

 

쟁반에 오렌지 주스를 받쳐 든 종수가 컵이 쏟아질까 종종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컵이 넘치도록 끝까지 다 채운 게 꼭 최종수를 닮았다. 잔을 내려놓는 손을 훅 낚아챘다. 종수야. 그대로 끌어당겨 안았다. 나랑 또 사귈래? 이런 말 같은 건 필요 없었다. 뒤에서 끌어안은 채 그대로 손등에 키스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 손을 빼자 그 손에는 그때 최종수가 집어던진 그 알이 커다란 다이아가 끼워져 있었다. 나, 이건 기억할게. 진짜로. 그러니까 다시는 집어던지는 거 금지야 알았지?

 

최종수는 연인을 믿지 않았다. 당한 것이 많아서. 그렇지만 믿지 않기에는 너무나 달아서 이번 한 번 만은 영원히 눈을 감아주기로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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